안녕하세요, 능골마을모임 조합원 정정일입니다.

능골마을모임에서 6월에 읽은 책은 한홍구교수님의 역사와 책임이었습니다. 이 책은 책임지지 않는 역사 속 인물과 사건들을 통해 그 주체나 배후로 지목된 인사들이 단죄되지 않고 번번이 역사에서 어떻게 화려하게 부활하고 명맥을 유지해 오고 있는지 보여주고 있는데요, 이런 현실에 먹먹함과 분노를 느끼고 있던 차에, 한홍구 교수님의 가을 인문학 첫 번째 강좌를 들었습니다. 많은 분들이 함께 했으면 더 좋았을 이번 강좌는 우리의 아픈 역사를 발굴하고 전파하는데 고군분투하시는 한홍구 교수님의 담담한 설명과 함께 묵직한 숙제까지 던져진 자리였는데요, 그 소감을 정리해보려고 합니다.

 

영화 암살의 흥행으로 독립운동가들이 새롭게 재조명되고, 반민족친일세력에 대한 관심도 뜨겁습니다. 교수님께서도 영화 암살의 등장인물들이 과거 우리 역사의 어떤 인물을 모델로 한 것인지 비교해주시면서 설명해주셨는데요.


현재 독립유공자로 서훈을 받은 사람은 13000, 그 중 여성독립운동가는 260여명이라고 합니다. 그 중에는 우리가 익히 듣고 알고 있는 독립운동가들도 있지만, 친일세력과 그 잔당들에 의해 배제되고 역청산된 인물들이 얼마나 많은가도 알 수 있었는데요, 강좌에서 소개된 인물들은 누구하나 가슴에 절절한 사연 하나 품지 않은 사람이 없을 정도로 드라마틱한 인생을 보여주었습니다. 독립운동가들이 연속된 수많은 실패 속에서도 포기하지 않고 주요 일본인사의 암살을 시도하고 투쟁한 역사에 대한 설명으로 강좌는 시작됐습니다.


윤봉길 의사는 두 명의 일본인에게 폭탄을 던졌는데요, 한 명은 일본이 공식 항복한 날인 194593, 항복문서 조인식장에서 절룩거리며 나타난 일본외무대신 시게미쓰 마모루입니다. 롯데그룹 신격호 회장의 부인이 시게미쓰 마모루의 외조카란 사실이 회자되면서 관심을 받았습니다.  이 사람은 목숨을 보전했지만, 다른 한 명의 일본인 상해침략군 사령관 시라카와 요시노리는 윤봉길 의사의 폭탄을 맞고 목숨을 잃었습니다. 여기에 분노한 일본인들이 윤봉길 의사를 잔인하게 처단하고 거리에 아무렇게나 시신을 매장하는 사진은 두고두고 눈에 밟혔습니다.


1908년 최초의 의열투쟁 스티븐스 사살사건은 대한제국의 고문이자 일제의 앞잡이 역할을 한 스티븐스를 죽이기 위해 샌프란시스코에 모여든 독립운동가들의 활약으로 유명한데요, 스티븐스 암살을 시도한 사람은 전명운과 장인환이라는 독립운동가였는데, 이들은 같은 목적을 가지고 같은 날 샌프란시스코에 왔지만 서로 전혀 모르는 사이였다고 합니다. 이렇게 각지에 흩어져있던 여러 독립운동단체들이 제각각 암살계획을 펼치며 독립운동가를 파견할 정도로 그 열기와 관심이 뜨거웠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습니다. 전명운은 실패했지만 장인환은 성공을 거두었는데요, 이들의 활약은 이후 윤봉길, 안중근의사의 의거로 이어진다고 합니다.


1930년대는 영화 암살과 같은 총격전은 없었지만 1920년대는 김원봉이 이끄는 의열단에 의해 경성 시내에서 격렬한 총탄전이 일어나고 무장투쟁도 적극적이었다고 합니다. 종로경찰서에 폭탄을 던진 김상옥, 총독부에 폭탄을 던진 김익상, 동양척식주식회사에 폭탄을 던진 나석주, 그리고 시인으로 알려져 있지만 실제로는 맹렬한 독립운동가로 독립운동 중에 틈틈이 시를 쓴 이육사에 이르기까지, 죽음을 무릅쓰고 투쟁한 독립운동가들이 얼마나 많이 희생됐는지 짐작할 수 있었습니다

 

또 신흥무관학교를 세운 우당 이회영선생은 조선 최대의 명문가 집안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여섯 형제가 독립운동을 한 것으로 유명하며 일가족 전체가 전재산을 팔고 만주로 망명하여 항일 독립운동을 펼치는 등 진정한 보수의 면목을 보여주어 감동을 너머 경외심까지 갖게 했습니다.


제대로 평가받지 못한 월북 독립운동가들에 대한 이야기도 가슴 아팠습니다. 그 중에서도 의열단의 우두머리격인 약산 김원봉(金若山)선생은 두 명의 친구가 있었는데요, 독립운동 최고의 조직자인 김약수(金若水)와 일제의 고유문화 말살에 대한 대응으로 복식사를 연구하기도 했다는 이여성(李如星)은 약관의 나이에 모여 산같이 물같이 별같이살자고 약속하며 독립운동을 맹세했다는 대목에선 코끝이 찡해지기도 했습니다

 

많은 독립운동가 중에서 여성독립운동가는 260여명이라고 하지만, 우리가 알고 있는 인물은 극소수일겁니다. 그나마 영화 암살의 안옥윤 때문에 새롭게 조명되고 관심을 받고 있는 것일 텐데요, 교수님은 몇몇 가슴 찡한 사연들을 가진 여성독립운동가들을 소개해주셨습니다.


당시 나이 47세의 손주까지 둔 할머니로, 암살단 활동을 하면서 세 번의 혈서를 쓰고 손가락 세 마디가 잘려나간 여성운동가 남자현. 의병 활동 중 목숨을 잃은 남편의 피 묻은 옷을 입고 거사를 준비했다는 일화로 유명하다는 이 분은 영화 '암살'의 안옥윤의 실제 모델이라고 합니다. 여성으로서는 보기 드문 의열투쟁가로, 일본총독 사이토 마코토를 암살하려다 실패하고 체포되어 옥고를 치루고 나와 다시 무토 노부요시 관동군 사령관을 죽이려다가 밀정 이종형의 밀고로 실패하고 죽음을 맞았다고 합니다.


또 조봉암선생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여성혁명가 김명시란 분도 소개되었는데요, 독립동맹 연안파의 여장군으로 언론에서는 잔 다르크라고 불릴 정도로 무장투쟁에 앞장선 인물이라고 합니다.


1930년대 사회주의 혁명가 이재유가 만든 경성트로이카의 일원이자, 경성트로이카의 조직원으로는 유일하게 생존해있다 98세의 나이로 돌아가신 이효정 독립운동가를 비롯해, 한국 최초의 공산주의자이자 최초의 사회주의 조직인 이동휘의 한인사회당을 탄생시키는데 일조한 김알렉산드리아의 사연도 들을 수 있었구요.


압록강을 6번이나 건너며 독립운동을 하고 독립운동가들의 안살림을 챙겼다는 정정화는 해방 후 살아서 돌아온 여성 중 한명이었지만, 부역자 처벌 대상자로 몰리면서 일제 때 자신을 고문하던 사람을 다시 대면하는 기구한 운명을 살기도 하셨답니다. 이런 쟁쟁한 역사 속 숭고한 인물들이 정당한 평가를 받기는커녕 존재 자체도 알리지 않는 이놈의 국가는 도대체 누구의 국가인지 먹먹한 한숨만 나왔습니다.


또한 안중근 열사는 의거에 성공한 후 체포되는데요, 항소하려는 안중근 의사에게 항소는 일본에 구걸하는 행위이고 옳은 일을 하다 받은 형이니 비겁하게 일본에게 구걸하지 말라고 만류하는 편지를 보냈다는 안중근열사의 어머니 조마리아 여사의 사연과 배추 잎으로 끼니를 때우며 모은 돈으로 독립군의 총기를 조달한 백범 김구 선생의 어머니 곽낙원 여사에 이르기까지 독립투사 어머니의 위대한 힘도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백범 암살을 선두 지휘한 김창룡과 독립투사의 어머니 묘가 현충원 안에 함께 있다는 현실에서는 깊은 한탄이 새어나왔습니다.

 

해방전후사에서 눈여겨 볼 것은 독립운동가들의 투쟁만은 아닐 겁니다. 독립운동가를 탄압하는 친일세력들의 반민족행위와 음모의 역사는 질기고도 치욕스럽게 전개되어 왔습니다. 또 시대를 달리할 뿐 청산되지 않은 역사는 어떻게 반복되고 계승되는지도 우리 역사는 여실히 보여주고 있는데요.


먼저 한국전쟁 중 한강다리를 폭파하고 대전으로 혼자 피난가면서 서울시민에게는 안심하라는 방송을 한 이승만은 서울로 되돌아오면서 자신의 서울 입성을 정당화하기 위해 뻔뻔하게도 한강다리 폭파 지시를 수행한 육군 대령 최창식에 사형을 선고하며 책임의 지위에서 벗어났습니다. 심지어 서울에 남아있던 시민들을 역으로 부역자로 몰아 처벌하기 시작했지요. 부역자 처벌에 앞장 선 사람은 친일파 민족반역자에서 반공투사로 변신한 김창룡과 노덕술과 같은 사람들이었지요, 김창룡은 백범 김구 암살을 안두희에게 지시한 인물로도 유명합니다. 이렇게 공안세력의 계보는 1940년대는 백선엽이, 1950년대에는 김창룡이, 1960년대와 1970년대는 공안세력 이후락으로 이어졌다고 합니다.


반민특위를 무력화시키고 해체를 지시한 이승만과 이를 실행한 일제친일세력들은 노덕술에서 박처원으로 그리고 이근안으로 이어지고, 친일판사 민복기의 후예는 김기춘에서 박상옥으로 그리고 황우여로, 친일에서 친독재의 견고한 카르텔을 만들어냈다고 합니다. 반민특위에 체포된 일제의 악질 헌병보조원 출신인 박종표는 나중에 풀려나게 되는데, 1960315일 부통령부정선거로 경남 마산에서 시위 중인 김주열에게 최루탄 발사를 지시하여 죽음으로 몰아넣은 당사자이기도 하구요, 영화 암살속 염석진이 반민특위 법정에서 웃옷을 벗고 자신을 항변하며 난동을 부리는 장면이 있는데, 밀고자 이종형 역시 반민특위에 입건되어 법정에서 난동을 부리다 무죄로 풀려나고 나중에 국회의원까지 지냈다고 합니다. 윤봉길 의사의 폭탄투하로 사망한 시라카와 요시노리를 되살려 자신의 일본식 이름으로 삼고 독립군 토벌에 앞장선 사람이  백선엽인데 육군참모총장까지 지내기도 했구요, 반민특위 활동이 본격화되자 친일경찰은 독립운동가들에 대한 살인청부를 의뢰하는데, 영화에서도 살인청부업자로 하와이피스톨이 등장하는데 실제로 이와 같은 역할을 맡았던 백민태는 이후에 친일경찰들의 암살음모를 폭로했지만 친일경찰들에 의해 뇌물혐의로 구속되는 운명에 처하기도 했답니다.

 

반민특위가 해체되고 현실의 법정에 세워야 할 인물들은 버젓이 핵심권력층을 누비며 건재하고 있고, 목숨을 걸고 독립운동을 했던 사람들은 역청산을 당하는 현실에서 한홍구 교수님은 반헌법 행위자들의 면모를 기억하고 역사의 법정에 세워야 한다고 강조하셨습니다.


특히 부림사건 담당검사이자 통합진보당 해산의 주역으로 현재 방문진 이사장이자 새누리당 세월호특별조사위 비상임위원인 고영주, 학림사건의 판사였지만 현재는 교육부총리인 황우여, 김대중내란음모사건에 사형판결을 내렸고 이명박 정부시절 마지막 총리를 역임한 김황식, 초원복집 사건으로 유명한 전 국무총리 정홍원, 삼청교육대를 만든 전 총리 이완구 등 청산하지 못한 역사 속에서 과거 우익들이 어떻게 부활하고 있는지에 주목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분단과 전쟁, 학살과 부역자처벌로 좌익뿐만 아니라 양심적이고 합리적인 진짜 보수도 역사에서 멸종하다시피한 현실이 참으로 안타까웠습니다.

 

이쯤에서 현대사에서 제대로 된 보수가 있었는지, 그리고 합리적인 보수란 무엇인가란 질문을 던져볼 수 있겠지요. 자연스럽게 한 번도 역사교과서에서 등장하지 않은 제헌헌법의 가치와 내용에 대한 이야기로 이어졌는데요, 제헌헌법은 대한민국을 재건하면서 그 주역들이 국민들과 맺은 협약을 말합니다. 대한민국의 건국은 1919년이고, 1948년의 정부수립은 대한민국의 재건이라고 명쾌하게 규정한 것인데요. 제헌헌법의 기초를 다진 유진오는 헌법의 기본정신은 자본주의적 경제체제를 폐기하고 사회주의적 균등의 원리를 채택하며, 정치적 민주주의와 경제적·사회적 민주주의와의 조화를 꾀하려고 하는 데 있다고 주장했다고 합니다. 이것은 다름아닌 경제민주화와 진보적 민주주의의 시초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당시 우파들이 만들었다는 제헌헌법이 얼마나 진보적인 가치와 내용을 담고 있는지 살펴볼까요? 제헌헌법 제18조는 노동자의 권리에서 노동3권과 더불어 이익분배균점권을 보장했다고 합니다. 이익분배균점권이란 기업에서 이익이 발생했을 때 그 이익을 노동자들이 똑같이 나눠가질 권리가 있다는 뜻이랍니다. 재벌기업들이 사내유보금을 7~800조씩 쌓아두고 있는 현실과 대비되는 대목이라고 할 수 있지요.


84조는 사회정의의 실현과 균형있는 국민경제의 발전을 담고 있고, 85조는 광물 기타 중요한 지하자원, 수산자원, 수력과 경제상 이용할 수 있는 자연력은 국유로 한다는 원칙을 천명한 조항이며, 87조 중요한 운수, 통신, 금융, 보험, 전기, 수리, 수도, 가스 및 공공성을 가진 기업은 국영 또는 공영으로 한다고 규정하고 있답니다. 당시 한반도에 존재하는 자본의 94%가 일본인 또는 일본제국주의 국가기관의 소유였고, 독립운동 당시 좌우익을 막론하고 해방 후 새롭게 건설할 국가의 주요산업의 국유 또는 국영을 주장했다고 합니다. 특정인에게 적산불하를 강행할 경우, 민중들의 거센 저항을 불러오고 공산혁명을 초래할까봐 그랬다는 거지요. 86조는 농지는 농민에게 분배하고 그 분배의 방법, 소유의 한도, 소유권의 내용과 한계를 법률로 정하고 있다고 합니다. 놀랍게도 지주들이 땅을 포기할 수 있었던 것은 남북이 분단된 상황에서 북쪽은 19463월 대대적인 토지개혁을 강행한데 대한 압박과 당시 전체 인구의 80%가 농민인데다 독립운동에 대다수 농민들의 지원이 필요한 상황에서 독립운동단체들이 토지혁명이나 토지국유화를 강령으로 내걸었기 때문이랍니다. 또 토지개혁조항에서 지주세력의 동참을 이끌어낸 것도 지주세력은 농지개혁으로 공산당의 세력화를 막을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래요.

 

명분이야 어찌됐든 보수들의 대타협의 결과로 이루어낸 제헌헌법의 가치와 내용은 알려지기는커녕, 오히려 통합진보당 해산과정에서 볼 수 있듯이 종북몰이의 대상이 되고 있는 형국이지요. 과거의 보수는 오늘날 우리가 목도하는 극우보수들과는 질적으로 얼마나 다른가를 알 수 있는 대목이었습니다. 진정한 보수의 복원이 얼마나 절실한가도 시사하는 바가 큰 것이죠.  한홍구 교수님께서는 대한민국의 역사적 정체성은 임시정부와 제헌헌법과 독립운동세력에서 찾아야 한다고  강조하셨습니다.


 영화 암살의 친일파이자 밀고자 염석진은 16년이 지나서도 처단되었지만, 현실 속 친일청산은 실패로 끝났을 뿐만 아니라 민족적 양심세력이 반대로 역청산당하는 수모를 겪었습니다. 독립운동가 유가족들이 빛도 들지 않는 쪽방에서 끼니를 걱정한다는 기사를 접하는 현실에서 우리는 무엇을 할 것인가 하는 깊은 고민도 시작됐습니다. 친일세력들은 현실의 법정에 세우지 못했지만 역사의 법정에는 기필코 세워야 한다는 결기를 다시 한 번 확인하면서 말이지요.  우리 역사에 대한 무관심과 무지가 잘못된 식민사관을 부추기고, 역사왜곡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는 패배주의적 역사관을 만든다는 것을 생각하면, 우리 역사에 대한  자기주도학습의 필요성도 다시한번 통감할 수 있었습니다.


강좌를 듣는 내내 불편했던 제 마음은 이랬습니다. 어느덧 모든 사회적, 역사적 비판의 중심에서 책임있는 어른으로서 대응해야 할 것 같은  40대를 맞고부터, 또한 한홍구 교수님의 말씀처럼 모순된 역사를 직면할 아이들에게 이 사회의 정의를 어떻게 설명하고 증명해 낼 것인가 고민하고부터 시작된 감정인데요, 청년시절 기성세대를 향해  던졌던 비판적 화살을 이제는 내가 과녁이 되어 맞을 수 있다는 위기감이 그것입니다. 동시에 그런 세대가 됐다는 사회적 책무의식에서 자유롭지 않다는 것을  생각하면 이런 청산되지 않은 역사의 그늘을 보는 것이 힘들 뿐만 아니라 다시금 개인적 삶을 반성하게도 만드는 것이죠.


박노자 교수의 칼럼 < '헬조선'에서 민란이 일어나지 않는 이유>에서는 신분의 대물림이 거의 제도화된 한국사회의 퇴행성을 암시하는 '헬조선'이란 신조어가 왜 젊은이들 사이에서 유행하고 있으며, 한국의 대외적인 사회적 지표와는 반대로 실제 국민들의 삶의 지수가 바닥으로 추락하고 있는 현실에서 죽창의 그림자도 보이지 않는 이유가 무엇인지 분석하고 있는데요. 매 위기의 순간, 들불처럼 일어났던 저항들이 왜 보이지 않는가에 대해 아직도 성장신화에 갇혀 경제가 성장하고 개인이 노력하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믿음으로 사회구조적 문제를 '자기탓'으로 돌리게 만드는 분위기를 꼽았습니다. 또한 젊은이들을 투쟁이 아닌 절망으로 모는 또 다른 요인으로 자주 '좌파'로 오인되는 무능력한 주류 개혁주의 정당에 대한 실망도 지적됐습니다. 기성세대 역시 이민을 토론하거나 팔자를 한탄하지, 현대판 동학농민혁명을 꿈꾸지 않는  이 사회에서 서로 연대해서 바꾸지 않는 이상 헬조선은 한동안 지속될 것이란 암울한 전망까지 내놓았는데요, 젊은이들의 절망코드나 자기탓의 문화 역시 책임지지 않는 사회가 젊은이들을 희생자로 만든 이유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강좌를 들으면서 해봤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연대란 책임있는 자들의 행동을 말하는 것이겠지요.

  

암살을 계기로 독립운동가들과 친일파에 대한 관심이 뜨겁습니다. 그 열기가 영화 속 감동으로만 그치지 않도록 친일인명사전앱도 다운받고, 교수님께서 추진하고 계신 반헌법행위자열전 편찬에도 관심을 가져보는 것으로 우리의 책임있는 행동을 고민하기 시작하면 어떨까요? 


우리가 믿을 것은 우리 자신에 대한 이 복원력밖에 없다. 더 이상 대한민국호를 책임지지 않는 자들, 위기의 순간에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르는 자들에게 맡겨 둘 수 없다. 살아남은 자의 슬픔을 간직한 이들이 움직여야 한다. 역사는 책임지는 사람들의 것이다.”

<<역사와 책임>> 중